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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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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연습 - 김승옥 「생명연습」 김승옥 그러한 왕국에서는 누구나 정당하게 살고 누구나 정당하게 죽어간다피하려고 애쓸 패륜도 없고그것의 온상을 만들어주는 고독도 없는 것이며전쟁은 더구나 있을 필요가 없다누나와 나는 얼마나 안타깝게 어느 화사한 왕국의 신기루를 찾아 헤매었던 것일까 “흥청대는 항구의 여름밤과는 상관없이 바위처럼 고독한 자세 하나가 우리의 눈앞에서 그의 기나긴 방황을 시작하고 있다.” 여수, 항구 도시의 비탈진 언덕, 소년과 그 소년의 누나는 바닥에 엎드려 건너편 의 선교사의 수음 장면을 몰래 지켜본다. 보편에게 느껴지는 이 색정의 이미지는 김승옥에게는 생명에의 애착으로 환기된다. 어린 호기심이 갈구하는 세상에 대한 궁금증은 쓸쓸히 자리잡은 생의 터에 화사한 빛 한 줄기를 쏟아낸다.수백의 책을 거쳐 다시 김승옥을..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민음사, 유숙자 옮김) “어디서 벌 건 다 마찬가지죠. 징징거릴 필요 없어요. 그걸로 족해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건 오직 여자뿐이니까.”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의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
외톨이 - 박형서 단편 「외톨이」 - 박형서 만남과 헤어짐을 겪을 때마다 누구나 조금씩 멸망해간다 “옛날 미얀마라 불리던 나라의 바닷가 동굴에 금술 좋은 박쥐 부부가 살았다. 둘 다 나이가 많아서 원하는 대로 변신할 수 있었는데, 낮이면 사람의 모습이 되어 손도 잡고 다정히 거닐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어두컴컴한 폭풍에 휘말려 둘은 그만 서로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다음날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박쥐 남편은 박쥐 아내를, 박쥐 아내는 박쥐 남편을 찾아 미친듯이 헤매었다. 둘은 파도가 밀려난 해변에서 마주쳤다. 서로 힘껏 부둥켜안고는, 지난 하루를 따로 보낸 게 너무나도 분하고 원통하여 일 년 동안 울었다.성범수는 이 전설을 만나는 사람마다 들려주었다. 특히 ‘지난 하루를 따로 보낸 게 너무나도 분하고 원통하여 일 년 동..
달 - 히라노 게이치로 「달」- 히라노 게이치로 자연이 그 가장 심원한 아름다움에 도달한 순간에는 어떠한 시구도 모든 힘을 잃고 말리라는 것을. 그 순간에 시는 결코 떠오를 수 없으리라는 것을. 1897년 일본의 나라 현, 이하라 마사키는 자신의 정신쇠약적 기질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자유 여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그가 행선지에 대한 고민에 싸여 있을 즈음 우연히 지나치던 서구적 차림색의 어느 여인은 요시노행을 권유한다. ‘벚꽃이 다 져도 요시노는 아름다운 곳인걸요.’ 그곳에 가면 그 아름다운 여인과 재회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단순한 기대로 그는 요시노를 통과하는 열차에 오르게 된다. 열차에서 그는 구마노 본사로 간다는 한 노인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노인은 다짜고짜 그가 자신과 함께 구마노 본사로 가야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사랑을 믿다 - 권여선 권여선 – 단편 소설 「사랑을 믿다」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한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다 주인공은 술을 즐겨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작은 기차간 같은 모양의 허름한 단골 술집이 있다. 서른 다섯살의 인생의 한낮에는 아직 사랑으로 모든 것을 상실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술집을 찾고 환등처럼 떠오르는 사랑을 마냥 기다린다.그가 다른 존재로 겪고 있는 이 영광스러운 고통을 자신도 어떤 이에게 남긴 기억이 있던가. 6년 전 그에게는 업무를 이유로 자주 마주치던 한 여자가 있었고 취향과 스타일이 비슷한 까닭에 한 시절을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업무가 바뀌고 그 역시 애인이 생긴 것이 비슷한 시기에 맞물..
일본 문화 사관 - 사카구치 안고 사카구치 안고 – 산문집 중 「일본 문화 사관」 인간은 오직 인간만을 사랑한다. 인간이 없는 예술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이 산문은 패전 후의 일본이 재생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실용적 미학 정신을 권유하는 글이다.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는 일본의 ‘이이토코토리’에 대한 반복적 언급임에도, 이 과정에서 풀어놓는 미에 대한 독창적인 안고의 철학은 매우 설득력을 가진다. 물론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은 그의 비판에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정도야 당면한 시제적 과제에서 어찌할 수 없는 고집 정도로 감안하면 된다. 미란 여러 기층을 두고 있으며 일상은 그 기층의 하나로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언제나 주위에 있어 흔해진 것들, 그래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들, 오직 기능으로 남은 것들, 이러한 사물들에서 재발견..
타락론 - 사카구치 안고 사카구치 안고 – 단편집 ‘백치, 타락론 외’ (최정아 번역, 책세상) 「타락론」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패전 후의 일본에 대한 자기 반성 요구 “반년 사이에 세상 변했다. ~인간이 변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원래 그러한 것이며 변한 것은 세상의 겉껍질일 뿐이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상태로 끝나게 하고픈 바람은 사람의 일반적 심정 중 하나인 듯하다. ~나 또한 수년 전에 지극히 친했던 조카딸 하나가 스물한 살에 자살했을 때, 아직 아름다울 때 죽어서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사도의 허위스런 바탕에 대한 고발 “무사도라고 하는 조야하기 이를 데 없는 한 법칙은 인간의 약점에 대한 방벽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닌다. ~원래 일본인은 가장 증오심이 적은 동시에 또 오래가지 않는 국민이며..
백치 - 사카구치 안고 사카구치 안고 – 단편집 ‘백치, 타락론 외’ (최정아 번역, 책세상) 「백치」 그들의 모자와 장발, 혹은 넥타이와 셔츠는 예술가였으나 그들의 영혼과 근성은 회사원보다 더 회사원적이었다 도쿄 변두리의 어느 마을 주인댁의 별채에 세들어 사는 이자와는 문화영화연출을 직업으로 하는 당대의 지식인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패전 위기의 일본의 현주소를 외면하는 지식인들의 허위 의식을 비난하면서도 스스로는 본디 가졌던 예술에 대한 열망 없이 비소해져가는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신문기자니 문화영화 연출기자니 하는 것은 모두 천업 중의 천업이었다. 그들이 아는 바는 시대의 유행이라는 것뿐이고~ 자아추구라든가 개성이나 독창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일상 대화에는 회사원이나 관리나 교사에 비해 자아네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