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16) 썸네일형 리스트형 단편 '나는 바다를 껴안고 싶다' - 사카구치 안고 사카구치 안고 – 단편집 ‘백치, 타락론 외’ (최정아 번역, 책세상) 신을 닮아가려 하는 인간은 왜 우스워지는가 「나는 바다를 껴안고 싶다」 ‘나’에게서 모든 것이 탄생한다. 나의 신체와 정신에 퇴적되는 모든 종류의 경험은 그러나 그렇게까지 신뢰할 것이 되지 못한다. 조금만 주의를 가지면, 아니 어쩌면 아무리 애를 써도 달성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논리란 것은 붕괴한다. 인간은 원래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법인데, 그게 부끄러워 자신을 속인다. 그것 만이 옳다거나 바람직하다고 그럴듯한 이유들을 갖다붙인다. 시간이 지나면 자기 역시 그 논리정연한 증거들에 속아넘어간다. 내가 가진 변덕이 너무 싫다고, 왜 나는 도통 알 수 없는 존재인가 하고 애타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은 조금은 이해 가.. 단편 '어디로' - 사카구치 안고 사카구치 안고 – 단편집 ‘백치, 타락론 외’ (최정아 옮김, 책세상) 최고의 것을 갖든가, 아니면 그 무엇도 갖지 않든가 「어디로」 “본능이라는 것을 방 안에 들이지 않기로 했던 것인데 어느새 음식보다도 먼저 여자의 몸이 아무 주저 없이 나의 고독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왔고, 때문에 솥이나 냄비가 자연스레 같이 따라 들어와 자리잡아도 이미 내 주관만을 고집할 수 없을 만큼 순결에 대한 지조가 흔들리고 있었다.인간이라면 삶에서 무언가 하나의 순결과 그에 대한 정절의 의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나처럼 나태한 낙오자의 비애가 그림자에까지 스며들어 따라다닐 지경에 이르면 무언가 하나의 순결과 정절을 지키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는 법이다. 나는 초라한 것이 싫고 그저 먹고 살아갈 뿐이라는 의식이 그 무.. 단편 '돌의 생각' - 사카구치 안고 사카구치 안고 – 단편집 ‘백치, 타락론 외’ (최정아 번역, 책세상) 위대한 문체는 오직 위대한 정신에서 탄생한다 「돌의 생각」 인간에게 있어서 부모의 애정이란 무엇인가. 유년의 결핍된 경험이 생애에 걸쳐 차지하는 부피는 지나치게 과잉된 것이 아닌가. 자처하지 않은 조건 탓으로 일찍부터 인생의 어두움과 허망함을 깨달아야만 하는 삶은 얼마나 고되며 불평등한 것인가. “아버지의 기질 중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나에게 보인 철저한 차가움이었다~ 나는 이따금 놀라울 만큼 차가워지는 자신을 느낀다. 내게는 온갖 것을 다 밀어내는 때가 있다. 그 이면에서 실은 난 그저 온 마음으로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백적인 사소설은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유년을 회고하듯 그려진다. 부모로부터의 무관심과 냉대는 그.. 결괴 - 히라노 게이치로 결괴 – 히라노 게이치로 (이영미 옮김, 문학동네) 가장 불편하고 날카로운 냉소는 시대에 대한 진실한 애정에서 비롯한다 일본 도시의 도처에서 범죄성명서가 동봉된 토막난 시체가 잇다라 발견된다. 이 범죄의 희생자는 오사카 근교에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어 생활하던 료스케라는 인물이며, 가해자는 도모야라는 중학생 소년과 스스로 악마로 일컫는 조력자 시노하라 유지다. 악마는 이 살인사건이 세간의 관심을 얻고 나아가 사회의 시스템 중추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키길 기대하며, 실제로 그의 추종자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살인행위를 이어나간다. 소설의 진행은 장르상 스릴러의 형식으로 복잡한 플롯을 통해 긴박하게 흘러가지만, 그 재미는 직접 소설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고 대부분의 장치와 지류가 되는 이야기.. '모비딕' - 허먼 멜빌 모비딕 – 허먼 멜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바다에 대한 열망은 좀처럼 사그러들줄 모르는 인간 심연의 이끌림이다. 육지 생활의 안녕과 풍요에 대한 만족이 점차 무기력한 나태으로 느껴지던 이슈메일은 넷티컷 사람들처럼 포경선에 올라 머나먼 항해에 떠날 마음으로 가슴에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그리고 넷티컷의 어느 여인숙에서 만나게 된 이국의 작살잡이 퀴퀘그와 함께 에이해브 선장이 이끄는 피쿼드 호에 승선하게 된다. 이 늙은 선장의 정체는 항해가 시작된지 수 일이 지나도 드러나지 않은 채 묘한 신비로움과 공포감을 자아낸다. 출항 전 어느 예언자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에이해브는 ‘모비딕’이라는 악명 높은 고래에게 다리를 잃은 후 그를 사로잡으려는 집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하지만 800페이지에 이르는 .. 얼굴 없는 나체들 - 히라노 게이치로 얼굴 없는 나체들 – 히라노 게이치로 (이영미 옮김, 문학동네) “옷을 걸친 여자에게선 아무런 진실을 찾을 수 없었다 ~ 보통 옷을 입음으로써 타자로부터 나체를 지킨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옷은 오히려 타자가 사는 일상이란 세계를 나체로부터 지켜주는 것이다.” 어느 일본의 중학교 운동장,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운동을 즐기고 있는 때 한 쌍의 남녀가 이를 배경으로 나체를 드러내고 촬영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이 학교에 근무하는 어느 중년 교사에게 발각되어 위기에 몰린 남자는 배낭 속에 넣어 두었던 나이프를 휘둘러 상처를 입히지만, 결국에는 학교의 선생들에 의해 제압되고 만다. 한편 뜻밖의 상황에 발을 동동 구르며 전전긍긍하던 여자는 경찰의 조사 끝에 인근 중학교의 선생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게 밝혀지고, 이는.. 만(卍) - 다니자키 준이치로 만(卍) - 다니자키 준이치로(김춘미 옮김, 문학동네) 가카우치 부인은 스무살 중반의 젊은 여인으로 남편과의 관계에서 별로 만족해하지 않는 인물이다.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고자 그녀는 그림 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나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빼어난 미모의 미쓰코라는 여성을 알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서는 가카우치 부인의 그림을 비화로 둘 사이에 불건전한 추문이 떠돌게 되고 도리어 이를 계기로 둘의 관계는 서로 돈독해지게 된다. 그런데 이 관계는 차츰 연인 관계와 흡사하게 진행되어간다. 가카우치 부인의 남편인 고타로는 이를 눈치채고는 묘한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히지만, 그녀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지고 노골적인 요구를 드러낸다. 그런데 부인에게 미쓰코로부터 전화를 통해 도움을 요청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결과..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 다니자키 준이치로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 다니자키 준이치로(이호철 옮김, 문학동네) ∙ 이토 세이 "남성이 여성을 숭배하는 것도 사상이다." 이 글은 일본의 설화집에 해당하는 모토가타리슈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의 야담을 하나의 역사서처럼 세심하게 추적해가는 소설이다. 고증하듯이 여러 문헌을 비교 서술하며 인물의 내력을 밝히고 있어 이 소설이 어디까지가 허구를 말하고 어디부터가 사실을 논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런 문제를 차치하고도 하나의 소설로 읽는 재미는 무척이나 뛰어난 것이었다.ᅠ 서두에 중심되는 인물은 헤이안 시대의 미남자이자 귀족 출신인 헤이주로서 그의 여성 편력과 애정 문제를 다루는 데 초점이 맞추어지다가 시헤이라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본격적인 이야기의 전개가 시작된다. 시헤이는 당대의 최고 권..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