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 단편 소설 「사랑을 믿다」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한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다
주인공은 술을 즐겨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작은 기차간 같은 모양의 허름한 단골 술집이 있다. 서른 다섯살의 인생의 한낮에는 아직 사랑으로 모든 것을 상실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술집을 찾고 환등처럼 떠오르는 사랑을 마냥 기다린다.
그가 다른 존재로 겪고 있는 이 영광스러운 고통을 자신도 어떤 이에게 남긴 기억이 있던가. 6년 전 그에게는 업무를 이유로 자주 마주치던 한 여자가 있었고 취향과 스타일이 비슷한 까닭에 한 시절을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업무가 바뀌고 그 역시 애인이 생긴 것이 비슷한 시기에 맞물려 그들은 그렇게 멀어지고 만다.
그리고 삼년 전,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로 그녀와 재회하여 그녀가 예약해두었다는 이 기차간 같은 술집에 들어서게 된다. ‘2년 전 쯤이었던가’ 자신이 이곳에 왔던 기억을 더듬거리다 그녀는 그때 함께 왔던 친구의 이야기를 술회한다. 이별의 한복판을 거닐고 있던 친구에게 건낸 그녀의 무력했던 조언들을 들으며, 그는 자신이 겪고 있던 실연에 대한 유대감으로 얼굴도 모르는 친구의 아픔에 동참한다.
그녀는 갑작스레 자신 역시 1년 전의 오늘, 같은 실연의 경험을 치뤄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때로부터 다시 1년 전의 일이라면 바로 3년 전 그들이 어울린 시기와 일치했기에 그는 혹시 그 당사자가 자기 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실연을 제공한 사람에 관해서는 자세히 밝히지 않은 채 대신 하나의 예화를 들려준다. 그것은 그녀가 그 고통에서 서서히 걸어나올 수 있던 계기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예화는 단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큰고모댁에 방문했던 이렇다 할 의미나 깨달음을 발견할 수 없는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그는 당시 그녀가 느꼈던 감정과 고뇌를 머릿속으로 조합하여보지만 실연의 아픔이란 것이 그런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안다.
악세사리를 달지 않는 수수한 옷차림과 제 기호에 맞추어 마음대로 메뉴의 조합을 바꾸는 배짱까지, 3년 전의 재회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에는 어딘가 이전과는 달라진 느낌이 있다. 그는 생각한다. 지금 자신에게 내리쬐는 한낮의 길을 당시의 그녀가 지나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만난 그녀에게 느껴지는 묘한 낯설음들은 바로 그녀가 걷고 있던 저물녘의 내리막 길에서 비롯한 것이었음을, 그녀는 그렇게 오후의 시간을 홀로 터벅터벅 거닐고 있었다는 것을.
문장들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긴다는 건 일상생활에는 재앙일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다.”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한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니까, 두 손 놓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니까.”
“나는 실연의 유대만큼, 대책 없이 축축하고 뒤끝 없이 아름다운 유대를 상상할 수가 없다.”
“생각해보니 그녀도 일 년 전, 몸이건 마음이건 어느 쪽으로도 기울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겉으로는 살 맞은 짐승처럼 꿈틀댔지만, 그 안쪽에서는 표면장력으로 팽팽한 절망의 비커를 붙들고 쓰디쓴 고통의 한 방울도 쏟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은 어떤 위로나 이해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가히 미친 균형이라 부를 만한 부동의 자세로 육체의 성마른 날뜀을 꼿꼿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시절을 견디자면 어쩔 수 없이 표독해지기 마련이며 그 표독함도 이를테면 맥주에 희석된 안동소주처럼 너무도 특별하고 아름다운 표독함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서른 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지만 이미 저묾과 어둠을 예비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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