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 다니자키 준이치로(이호철 옮김, 문학동네)
∙ 이토 세이 "남성이 여성을 숭배하는 것도 사상이다."
이 글은 일본의 설화집에 해당하는 모토가타리슈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의 야담을 하나의 역사서처럼 세심하게 추적해가는 소설이다. 고증하듯이 여러 문헌을 비교 서술하며 인물의 내력을 밝히고 있어 이 소설이 어디까지가 허구를 말하고 어디부터가 사실을 논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런 문제를 차치하고도 하나의 소설로 읽는 재미는 무척이나 뛰어난 것이었다.ᅠ
서두에 중심되는 인물은 헤이안 시대의 미남자이자 귀족 출신인 헤이주로서 그의 여성 편력과 애정 문제를 다루는 데 초점이 맞추어지다가 시헤이라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본격적인 이야기의 전개가 시작된다. 시헤이는 당대의 최고 권력 중에 하나인 좌대신에 오른 미남자로서 여러모로 헤이주와 죽이 맞아 그들은 서로 잦은 만남을 이어간다.
어느 날 이 두 젊은이들의 술자리에서 시헤이는 세간에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하다는 어느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헤이주에게 늘어놓고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어내고자 했다. 헤이주로서도 이 여인과 두세 번 밀회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넌지시 몇 마디의 말을 던졌고, 이때부터 시헤이는 그 ‘부인’(아리와라)를 차지하고자 음모를 계획한다.
한편 ‘부인’은 따지자면 시헤이의 백부되는 구니쓰네라는 노인의 정실부인의 자리에 있었다. 계급과 지위를 고려할 때 그는 물론 자기보다 미천한 위치에 있으나 집안 내에서는 마땅히 공대하여야 할 어른이라, 시헤이는 우선 선물을 여러 차례 보내는 것으로 구니쓰네로부터 신임을 얻는다. 구니쓰네로서도 당대의 가장 고관에 해당하는 그가 보내는 황송한 대접에 감격하여 살뜰히 준비한 연회를 마련하여 이들은 함께 술자리를 갖게 된다.
이날 시헤이는 취기를 틈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 ‘부인’을 억지로 빼앗아 자신의 처소로 데려가버린다. 그런데 구니쓰네는 자신처럼 늙은 노인에게 50살이나 차이가 지는 이 아름다운 여인이 어울리지 않다고 여기던 터였고, 그녀의 행복을 진심어리게 소원하기도 하던 차여서 한동안은 자신의 결정을 옳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곧 그녀를 잊지 못하는 마음이 되살아난 그는 남은 생애를 오로지 오매불망 애타는 그리움으로 보내게 된다.
구네쓰네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 시름과 미혹에서 벗어날 수 없자 부정관이라는 불교의 수행 방법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는데, 이는 시체를 접함으로써 현세의 아름다움을 부정한 것으로 인식하는 수양법이었다. 그러나 그와 ‘부인’ 사이의 아들 시게모토는 이런 아버지가 결국은 불법의 힘에 의해서도 어머니를 결코 잊지 못하고 죽게되는 모습을 관찰하게 되고, 자신 역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지 못한 채 차츰 나이가 들어가게 된다.
시게모토는 유년 시절에는 유모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를 찾아가 만나뵌 얼마간의 기억을 가지고는 있었느나 몸이 자라나고 어머니도 새로운 집안에서 자리잡은 세월이 길어짐에 따라 이 둘은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기에 그의 그리움 역시 매우 사무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러 시게모토는 비구니가 되어 홀로 산 속에 은거하는 어머니를 찾아가 해후하게 되고 이 고조된 분위기를 끝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봄밤의 정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만큼 표현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아름다운 문장들은 아래에 덧붙이기로 하고 이 소설의 위대한 면모를 따져보자면 원작자의 집요한 탐미적인 자세와 읽으면서 수없이 감탄하게 된 번역가의 유려한 우리말 솜씨를 따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애정 문제를 주로 다루어 심오한 주제를 거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삶의 진면목에 도달하는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재주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부정관이라는 수양 양식 역시 필자가 예전 대학의 명상 수업에서 조금이나마 접한 기억이 있어 독특한 감회를 주었는데, 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시기와 그 소유애에 대한 절망들을 해소하는 데 어떤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가지게 하였다. 물론 구니쓰네는 결국 그에 실패하고 그리움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했지만 말이다.
어떠한 인간을 이끌어가는 것은 관념이 대부분의 동력이 된다. 사랑과 아름다움 역시 그런 관념의 덩어리들로 여기에 미혹되고 발이 매인다면 벗어날 길을 찾는 것은 진정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이러한 가운데 문학을 손에 쥐었고 이 소설과의 우연적이자 마땅히 필연적이었야할 만남은 스스로에게 내일이라는 걸 여전히 기대할 수 있도록 솟아난 맑고 청렬한 우물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헤이가 연회 끝에 권세를 이용해 구니쓰네에게 아리와라를 얻어내는 대목에서 그녀의 등장
“노인이 발 쪽으로 손을 들이밀자 그 발의 겉면이 안에서부터 불룩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밤눈으로 보기에도 보라색, 엷은 홍매화 색 등 갖가지 색깔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소맷자락이 비집고 나왔다. 그건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의 일부였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삐져나와 보이는 모양이 마치 만화경처럼 반짝반짝 눈부신 색채를 지닌 물결이 밀려오는 듯하고, 요염한 양귀비꽃이나 모란꽃처럼 두드러져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 크기의 한 송이 꽃은 겨우 반 정도 몸뚱이를 내놓은 모습으로 늙은 남편에게 가만히 소맷자락을 잡힌 채, 그 이상은 모습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듯이 보였다. 늙은 남편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끌어안듯 하면서 그녀를 손님 쪽으로 더 당기려 했는데, 그럴수록 그쪽은 발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려고만 들었다. 얼굴은 부채로 가려서 눈이나 코는 들여다볼 수도 없고, 부채를 든 손가락 끝도 소매 속에 숨겨져 있어 당지 양어깨로 길게 내려 드리워진 머리카락만 보일 뿐이었다.”
자신의 정실부인을 무기력하게 떠나보내는 구니쓰네의 마지막 전언
“나를 깡그리 잊지는 마시기를”
아내를 단념하기 위해 불법에 의지하는 구니쓰네, 부정관(不淨觀)을 수행
“요컨대 그것을 하면 사람들의 여러 가지 관능적인 쾌락이 죄다 한때의 미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그립고 그립게 여겨지던 사람도 그리워하지 않게 되고, 눈으로 보아서 아름답다든가 먹어서 맛이 있다든가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진다든가 하는 것들이 실은 아름답지도 맛있지도 향기롭지도 않은, 더러운 것임을 터득하게 된다.”
시게모토가 아버지 구니쓰게의 야행을 미행하는 장면의 외경 묘사
“여든 먹은 늙은이와 겨우 일고여덟 살인 아이 걸음이었으니 그리 멀리까지 갔던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시게모토에게는 꽤나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원체 깊은 밤중이라 한길에는 그 두 부자 말고는 인적이라곤 전혀 없었고, 아버지 모습은 멀리 흰 달빛에 반사되어 놓칠 일은 없었다. 길은 처음 한동안은 위압적인 저택들이 이어지다가, 차츰 볼품없이 대나무나 갈대로 짠 담벼락이며 지붕 위에 돌이 얹혀 있는 초라한 판잣집들이 나왔다. 여기저기 물웅덩이나 빈터가 점점 많아지고, 억새나 그 밖의 가을 풀들이 껑충하게 자라 있기도 했다. 무성한 풀 속의 풀벌레들은 두 사람이 가까이 가면 문득 울음을 멈추었다가 멀어지면 다시 울어댔는데, 교외 쪽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비가 내리는 것처럼 소리가 시끄러워졌다. 그러던 중에 집이라곤 한 채도 없고 눈길 닿는 저쪽 무성하게 자란 풀 속에 좁은 길 하나가 구불구불 나 있는 곳에 이르렀다. 외길이지만 이리저리 구부러진데다 풀도 사람 키보다 높아서, 아버지 모습이 더러는 보이지 않게 되어 할 수 없이 시게모토도 조금 가까운 거리까지 좁혀갔다. 양쪽에서 길로 뻗어나와 통째로 길을 가린 풀들을 두 손으로 헤치며 가자니 소매며 옷단이 금방 이슬에 젖어서 차가운 물방울이 목젖까지 스며들었다.”
소설에서 밝히는 부정관의 수행 방법
“부정관의 수행 방법은 선승이 좌선을 하듯이 홀로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두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어느 하나의 일을 향해 상념을 집중시키는 일로 시작된다. 하나의 일이란, 예를 들어 이 내 몸은 부모님의 음탕한 즐거움의 산물이어서 본래는 부정불결한 액체에서 생겨났다는 사실, 즉『대지도론』의 말을 이용하자면, '사람이 화합할 때 몸 안의 욕정의 벌레인 남충은 백정(白精), 눈물처럼 나오고, 여충은 적정(赤精), 토하듯이 나온다. 골수의 기름이 흘러 이 두 개의 벌레가 눈물 흐르듯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어서, 이 붉고 흰 두 액체가 합쳐진 것이 자기 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다음, 태어날 때도 더럽고 냄새나는 통로를 거쳐 나온다는 것, 태어난 뒤에도 대소변을 쏟아내고 콧구멍으로 콧물을 흘리고 입으로는 냄새나는 숨을 내쉬고 겨드랑이에서도 끈적끈적한 땀을 낸다는 것, 몸 안에는 똥이나 오줌이나 고름과 피와 기름이 있고, 내장 속에는 오물이 꽉 차서 여러 가지 벌레가 우글거리고, 죽고 나면 그 시체를 짐승들이 달려들어 뜯어먹거나 새들이 쪼아 먹고, 팔다리를 찢어지고 비릿한 악취가 사방 삼십 리 오십 리까지 퍼져서 사람들은 코를 막고, 피부는 시꺼메져서 개의 사체보다 흉한 모습이 된다는 것, 요컨대 이 몸은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후까지 부정(不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부정관을 통해 얻어지는 참된 응시
“『마하지관』에서는, 이러한 수행 방법을 설명하며 인체의 부정을 심지어 종자부정이라거나 오종부정이라는 식으로 세세하게 설명한다. 이 책은 또한 사람이 죽어서 그 시체가 변화해가는 과정을 샅샅이 그려내며, 첫번째 과정을 괴상, 두번째 과정을 혈도상, 세번째는 농란상, 네번째는 남은 살이나 피부가 퍼렇게 변색되는 청어상, 다섯번째는 시체가 새나 짐승에게 먹히는 모습인 담상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상을 체관하지 못하면 쉽게 어느 누구를 사랑한다든지 애착을 느끼지만, 만일 진정으로 이것을 체관하여 어느 경지를 넘어서면 모든 욕심이 사라지고 바로 전까지 아름답다고 느낀 것도 역겨워서 못 견디게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변을 보지 않았을 때에는 밥을 먹고 싶다가도 일단 변 냄새를 맡으면 메슥거려서 밥을 못 먹게 되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구니쓰네가 미혹과 번뇌을 떨쳐내고자 시체를 찾아간 일에 대한 설명
“하지만 혼자서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앉아 이러한 이치를 생각만 한다든지 변화하는 과정을 상상만 해서는 충분히 터득이 안 되는 경우도 없지 않아서, 더러는 사람 시체를 버려둔 곳으로 일부러 찾아가서『지관』에 쓰여 있는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도 역시 하나의 방법이라, 앞에서 본 수행 중인 스님 같은 사람은 그걸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스님이 밤마다 산을 지나 들판에 찾아갔던 것처럼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번씩이나 가서 시체가 변해가는 과정을 나름대로 관찰하여 괴상이나 혈도상이나 농란상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자기 방에 단정히 앉아 눈을 감고 있기만 해도 그것들이 죄다 보이게 된다. 아니, 더 나아가, 설령 세상 사람들 눈에는 절세 미인으로 보이는 부인을 납치해 왔다고 해도 수행자의 눈에는 더럽게 썩은 하나의 살덩어리나 피고름 덩어리로만 보여서 욕망을 일으키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다.”
결국 아리와라의 미혹에서 떨쳐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구니쓰네
“그러나 시게모토의 기록만으로는 그 이상은 알 수 없었고 단지 그 무렵의 앞뒤 사정으로만 판단해볼 때 마지막까지 끝내 구원받지는 못했고, 사랑하는 분의 아름다운 환영에 패하여 영겁의 미혹을 안은 채 죽어갔으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일은, 늙은 대납언에게는 가슴 아픈 결말이었겠지만, 시게모토에게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모독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요행이었다.”
40년의 세월이 흘러 어머니와 해후하게 되는 시게모토, 이 작품의 압권이라 할 만한 아름답고 그윽한 정경 묘사
“한데 그로부터 다시 몇 년이 지난 어느 해 봄이었다. 히에이 산 요코가와의 료겐의 방에서 하룻밤 묵은 시게모토는 이튿날 해가 떠오르고도 한참 지나서야 방을 나왔다. 그는 고갯길로 접어들어 서쪽에 있는 탑과 강당을 거쳐 본전의 네 갈래 길목에 왔을 때, 문득 갑자기 마음이 끌려 기라라자카 쪽으로 향했다. '갑자기'라는 것은 그때 난데없이 그런 기분이 일었다는 건 아니고, 전부터 한번 가보자, 가보자 생각은 있으면서도 어쩐지 그걸 막는 무언가가 있어 못 가곤 했는데, 그날은 유독 봄이 한창이고 아지랑이 낀 먼 산의 여기저기 골짜기마다 푸짐한 꽃구름이 보여, 이끌리듯이 들뜬 마음으로 한번 스적스적 걸어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 밖에 딱히 이거다 하는 목적은 없었지만, 그쪽 길을 내려가면 당연히 니시사카모토 쪽으로 나가게 될 것이니 어머니가 사시는 곳은 어떤 곳인가, 불현듯 그 모습이나 한번 뵈었으면 하는 정도의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시게모토가 그 길로 들어설을 때는 해가 서서히 서편으로 기울던 무렵이어서 무넘기 언덕 근처를 지나 오토와 폭포 소리를 들으면서 산자락에 닿았을 무렵에는 어느새 하늘에 탐스럽고 몽롱한 달이 빛나기 시작했다. 저 미부노 다다미네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리 떨어지는 폭포 물 위로 세월은 쌓여
늙어 그리 됐나 검정 머리는 간 곳 없으니
그는 이 폭포를 읊은 걸까. 폭포 끝은 오토와 강이라고 하는 외줄기 흐름이 되고, 길은 냇물가를 따라 내려가므로, 그저 무심히 더듬어가니 나지막한 울타리 너머 나무들 틈으로 별장풍의 집 한 채가 보였다. 시게모토는 워낙 오래되어 군데군데 뭉개진 낡은 담을 가랑이를 벌리고 훌쩍 뛰어넘어 안으로 한두 발짝 들어가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조용할 뿐 사람이 사는 기척조차 없었다. 동쪽으로는 히에이 산의 봉우리로 이어지는 마루턱이 솟아 있고, 서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룬 산들이 뻗어 있었는데, 여기저기에 연못을 파고 돌을 쌓아 올려 동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인 뜨락의 모습은 옛날 한때는 번성한 듯했지만 지금은 처연하게 황량해져서 맨땅에는 잡초도 무성하고 나뭇가지에는 넝쿨들이 그물처럼 엉켜 있었다.
그 근처는 산이 가까운데다 숲도 그런대로 깊어 해가 멀고, 황혼 무렵이 되자 냉랭한 공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시게모토가 지난해의 낙엽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헤치면서 본채로 보이는 건물까지 가서 보니, 그곳도 지금은 폐옥이 된 듯 격자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저녁녘인데도 등불 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잠깐 계단 아래에 걸터앉아 피곤을 달래던 시게모토는, 여닫이문의 경첩이 고장나서 문 하나가 거의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걸 보고는 마루에 올라서서 살짝 안쪽을 들여다보았으나 그 안은 컴컴했고 곰팡이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시게모토는 그전에는 누가 살았을까 생각하며, 혹시 산장이 아니었을까 하고 조금은 궁금해졌다. 지금에 와서는, 그러니까 그 중납언이 저세상 사람이 되고 나서는, 그 누구도 사는 사람이 없어 이렇게 그냥 내팽개쳐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중납언과 함께 이 산장에 기거했고 그가 죽은 뒤에는 어딘가 이 근처 가까이 암자에서 지낸다는 어머니도, 지금은 어쩌면 이곳 어디쯤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세간을 버렸다 한들 여자 몸으로 이런 호젓한 곳에서 살지는 않으실 테지…… 시게모토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묘하게 귓속이 지잉 하고 울리는 듯한 고요 속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위의 어둠과 적요는 뭉클하게 더해갔는데, 아무튼 그곳이 한번쯤은 어머니가 사시던 곳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쉽사리 일어설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부엉이 우는 소리에 섞여 여울물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그 소리를 따라 그도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물의 흐름을 좇아보았다. 작은 못 하나를 돌아서 뜨락 안의 동산 하나를 넘고 잔나무들 사이를 빠져나가자, 과연 깎아지른 곳에 폭포 하나가 또 있었다. 높이는 일고여덟 척쯤 될까, 깎아지른 절벽은 아니었고 완만하게 높이가 진 곳곳에 신기한 모양의 돌이 얹혀 있고, 떨어지는 물살이 돌 사이로 굴곡을 지으며 하얗게 거품을 내며 흐르고 있었다. 단애 위로는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가지를 쭉 뻗쳐서 폭포 위를 덮듯 하고 있었는데, 과연 그러면 그렇지, 이 폭포는 저 오토와 강의 물을 끌어와서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시게모토는 저 '저 오토와 강물을 끌어들여 떨어지게 한'이라고 읊은 이세 노래의 가사가 대번에 떠올랐다. 아무렴, 노래에 있는 '폭포'는 이것을 노래함이 확실해서, 이 산장이 바로 그 죽은 중납언의 별장 자리였다는 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시게모토는 저녁 황혼이 한층 짙어져 수면조차 보기가 조금 어려워지자, 이제 슬슬 돌아가볼까 생각하면서, 하지만 아직 왠지 약간의 미련이 남아서 시냇물 속의 돌 몇 개를 훌쩍 건너뛰어 폭포 위쪽으로도 올라가봤다. 그곳은 이 댁의 영역 밖인 듯 돌들이 놓여 있는 모양새부터가 인위적인 정원 같지는 않고, 그저 그런 살풍경한 산길이었다. 문득 그 건너편을 보니 시냇물가의 깎아지른 언덕 위에 커다란 벚나무 한 그루가 주위로 막 내리는 저녁 그늘을 와락 튕겨내듯이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보는 이 하나 없이 피고 지는 깊은 산중의」라고 읊은 쓰라유키의 옛 노래는 가을 단풍을 읊은 것이었지만 그런 때 그런 골짜기에, 누구 하나도 모르게 봄을 자랑하며 피어 있는 벚꽃 또한 '밤의 비단'인 것은 틀림없었다. 마침 길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나무 하나만이 홀로 떨어져 우뚝 솟은 우산처럼 가지를 펼치고 서서 그 주변을 아련히 밝게 비추고 있었다. 누구나 흔히 겪는 일이지만, 인적이 드문 어두운 밤길을 가다가 홀로 걷는 아리따운 묘령의 여자 하나와 문득 마주칠 때는, 남자 하나와 그렇게 만났을 때보다 오히려 섬뜩하고 무서워지기도 한다. 그와 같이 무인지경에서 조용히 양껏 혼자 피어 있는 저녁나절의 벚꽃에는 뭔가 도깨비 비슷하기도 한 요염한 것이 달라붙어 있는 듯도 여겨졌다. 시게모토는 자기 눈을 의심하면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조금 거리를 둔 채 벚나무를 건너다보기만 했다. 벚나무가 있는 언덕은 거의 한 덩어리 전체가 이끼투성이인 엄청나게 큰 바위였다. 개울에서는 꽤나 높이 울뚝 불거져 나와 있었고, 맑디맑은 좁은 물줄기 하나가 어디선가 삐져나와서 언덕 아래를 휘돌아 시냇물로 흘러 떨어지고, 언덕 중간쯤부터는 황매화 한 무더기가 시냇물 쪽으로 휘늘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까부터 꽤 시간이 지났을 텐데도, 지금 시게모토가 머물러 있는 곳에서 건너의 세밀한 경치들이 이렇게도 영롱하고 선명하게 보이니, 꽃들이 마치 눈빛처럼 작용해 막 드리워지는 어둠 속에서 근처의 풍경을 저렇게 떠오르게 하는 것일까 하고 시게모토는 생각했지만, 사실은 꽃이 뿜어내는 빛이 아니라 꽃 위의 하늘에 걸려 있는 달이 바야흐로 더더욱 밝아졌기 때문이었다. 땅 위는 차가운 습기로 가득해 살갗에 공기의 찬 기운이 닿았지만, 하늘은 음력 3월이고 부옇게 흐렸으며, 달빛은 꽃구름을 뚫고 비추고 있어, 저녁 벚꽃이 풍겨내는 향내에 섞여 골짜기 한구석은 환상적인 빛깔 속에 잠겨 있었다.
일찍이 시게모토는 아버지 뒤를 따라 들판을 걸으며 푸르스름한 달빛 밑에서 처참한 광경을 본 일도 있었지만, 그건 가을 한밤중의 칼끝처럼 맑은 달로, 오늘처럼 부옇고 솜뭉치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달은 아니었다. 그때의 달은 이 땅 위에 있는 미세한 물체까지 죄다 분명히 식별할 수 있도록, 시체의 내장조차도 분명히 가려 볼 수 있게 했지만, 오늘 밤 저 달은 근처에 널려 있는, 가령 가느다란 실과 같은 맑은 물의 흐름, 바람 한 점 없이 떨어지는 벚꽃 한 잎 두 잎, 황매화의 노란 꽃잎을 그 색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모든 것을 환등 그림처럼 뿌연 선으로 테두리를 둘러주어 왠지 현실과 다른 신기루같이 그저 한 순간 공중에 그려진, 눈을 깜빡이면 금방 사라져버리는 세계처럼 느끼게 했다……
그렇게 이상야릇하고 기묘한 광채 속의 일이어서, 언제부터 그곳에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애매하지만 곧 시게모토는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던 어떤 것─무언지 하얗고 둥실둥실한 것이 그 벚나무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꽃이 무성하게 달린 가지 하나가 바로 위까지 내려 드리워져 있어서 처음에는 두 가지가 뒤섞여 가려내 보기가 어려웠다. 꽃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하얗고 둥실둥실한 그것은, 어쩌면 그가 보기 전부터 그곳에서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사실대로 말하면 시게모토는 그걸 보고 금세, 무척이나 자그마한 승려, 낮은 키와 좁은 어깨로 판단컨대 비구니로 추정되는 사람이 벚나무 밑동에 거의 붙어 멈춰 서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이, 나이 많은 승려들이 더러 방한용으로 쓰는 하얀 명주 모자를 머리에 완전히 덮어쓰고 있어서 그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고 알아채긴 했지만, 바로 그 찰나에, 아니 아니, 이건 꿈이다, 이런 곳에 어떻게 비구니가 있겠는가,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건가, 그게 아니면 도깨비 같은 저녁 벚꽃 요정이 나타난 건가…… 하고 지금 보이는 눈앞의 세계를 송두리째 부정하려 들어서, 확실하게 자기 눈으로 보고 있는 그것을 계속 보면서도 일부러 믿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부정하려고 해도, 달 표면을 덮고 있던 구름의 두께가 얇아지면서 점점 사람의 그림자가 뚜렷해졌고, 반신반의했던 모습이 비구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녀가 쓴 모자는 마치 에도 시대 두건처럼, 목 전부를 덮어서 어깨 위까지 내려와 있었다. 시게모토가 있는 곳에서는 얼굴은 알 수 없었는데, 홀로 기대서서 하늘 쪽을 올려다보는 것은 송두리째 꽃구경에 빠져 있는 건지, 그 꽃 위에 있는 달에 흠뻑 빠져 있는 건지…… 곧 비구니는 조용히 꽃 아래로 내려서며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맑은 시냇물 옆까지 가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뻗어 황매화 가지 하나를 꺾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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