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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시간/다시, 그리고 서울은

비육지탄

 

분노를 관계의 처세로 삼으면 삶이 한층 수월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시한 취향과 의욕들 그리고 이를 가진 외형의 변천을 바라볼 때마다 세상이 자꾸만 좁아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불안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의 불안이 눈 언저리에 엉겨붙어 있다. 너의 의식은 오로지 반사된 집단의 의식인데, 그것이 얽히며 충돌하는 이 사회의 장이란 정말이지 어지러운 것이다. 그렇게 애써봤자 대부분 시시하다. 너의 감탄과 사랑은 마찬가지로 시시하다. 아이러니하게 역전된 감각을 가지고 너는 끊임없이 떠들고 싶어한다. 

좋은 것이란 참으로 간단한 재료들인데 그걸 더듬을 촉각이 네게는 없는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빛나지 못한다.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가야한다. 서울은 이 쓰레기 더미로 가득해서 꽃이 피지 못한다. 백 년 전의 상식을 쫓아가는 데도 또 다른 백 년이 필요하다. 논리란 것은 입 아픈 동어반복이다. 말은 간결할수록 좋고, 감각은 느릴수록 풍요롭다. 어차피 그 대강에는 하찮은 의욕 덩어리 하나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연기다.

나는 그런 연기자들을 특별하게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나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들인 것이다. 개중에는 자신이 연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좀 음흉하다. 음흉한 것은 그들의 처세인가.

웬만해서 문학이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물론 하루키도 살아 있고, 이창동도 영화를 만들지만, 도대체가 업을 진다는 사람들이 졸렬하기가 딱 계간지에 실리는 현대시 수준이다. 그런 시를 쓰는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로 음흉하다. 질량이 없는데 부피를 가진 척을 한다. 슬픔의 단계, 고뇌의 단계, 고독의 단계 이 모두가 유치하다. 모르면 아는 척 하지 마라. 모르면 읽지 마라. 슬픔도 결국에는 지능의 문제다. 

이장혁의 <외출>을 부르고 싶다. 그러나 정녕 달아날 곳이 없다. 새벽의 텅빈 지하보도를 알고 있으면 누가 귀띔을 해주길 바란다. 나는 도시인이라 도시에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 도시는 분명 그런 절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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