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구치 안고 – 단편집 ‘백치, 타락론 외’ (최정아 번역, 책세상)
위대한 문체는 오직 위대한 정신에서 탄생한다
「돌의 생각」
인간에게 있어서 부모의 애정이란 무엇인가. 유년의 결핍된 경험이 생애에 걸쳐 차지하는 부피는 지나치게 과잉된 것이 아닌가. 자처하지 않은 조건 탓으로 일찍부터 인생의 어두움과 허망함을 깨달아야만 하는 삶은 얼마나 고되며 불평등한 것인가.
“아버지의 기질 중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나에게 보인 철저한 차가움이었다~ 나는 이따금 놀라울 만큼 차가워지는 자신을 느낀다. 내게는 온갖 것을 다 밀어내는 때가 있다. 그 이면에서 실은 난 그저 온 마음으로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백적인 사소설은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유년을 회고하듯 그려진다. 부모로부터의 무관심과 냉대는 그가 최초로 가졌던 인간에 대한 유대이다. 이러한 배경은 그 역시 유사한 유의 냉소를 가지게 만들고 애정이 결락된 건조한 시선으로 자신의 부모를 관찰하게 만든다. 더불어 남달리 발달한 그의 관찰력과 감성은 독창적인 세계관의 형성에 조력한다.
“내가 오늘날 사람을 보고 첫눈에 좋고 싫음과 신용, 불신용을 결정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이 이 슬픔의 소재 여부다~ 나는 오늘날 정치가나 사업가 타입의 사람, 어린 아이의 슬픔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반발을 느끼고 한 발자국도 양보하기 싫은 기분이 되지만, 이 슬픔의 그림자가 늘 붙어 다니는 사람에게는 조금의 경계심도 없이 마음을 터놓고,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이야기하며 작은 울타리도 만들 줄 모른다.”
이는 모비딕의 한 구절인 ‘내면에 슬픔보다 기쁨을 더 많이 가진 자는 진실할 수 없다’을 떠올리게 한다. 언제나 삶이 기쁨과 활력으로 충만해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부자연스러움과 허위의 껍질 같은 게 느껴진다. 슬픔은 가라앉지도 극복되지도 않는 우리 육신의 일부다.
“나는 유치원 시절부터 이미 이 길 저 길 바꾸어가며 모르는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그런 슬픔에 중독되어 있었지만 학교를 쉬고 소나무 아래 보리수 나무 수풀 그늘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볼 때는 더더욱 허망하고, 언제나 애절한 마음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무엇보다 바다가 좋다. 단조로운 모래사장이 좋다. 바닷가에 누워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하루 종일 그렇게 있어도 왠지 마음이 채워진다. 그것은 소년시절에 거의 숙명처럼 가슴에 뿌리내린 나의 마음이었으며, 또 고향의 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점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은 누구나 바다라든가, 하늘이라든가, 사막이라든가, 고원이라든가, 그런 끝모를 허무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나는 산이 있고 계곡이 있는 산수의 풍경에는 마음의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집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증오를, 바다와 하늘과 바람 속에서는 고향과 사랑을 느꼈다.”
슬픔의 형식은 자연의 형식과 유사한 모습일까.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말없이 보듬어 주는 것이 자연이기 때문일까. 주인공은 자연에서 느끼는 평온의 감각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나는 파란 하늘 아래로 탈출하고 싶다.”
그는 아버지의 용렬한 기질이 스스로에게 드러나는 것을 매우 못마땅히 여기며, 아버지가 가진 성실성과 희생적인 가치관의 내부에 자리한 비겁한 면모를 파헤친다.
“아버지는 어른이었다. 꿈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쁜 일을 할 수 없는 남자였다.”
“아버지의 현학 취미는~ 나에게도 다분히 이와 통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공허하기 짝이 없는 문인 취미의 기질적 유전처럼 느껴져 나는 외로워지고, 쓸쓸해지고, 또 한심해진다.”
한편, 그는 어머니의 냉대에 같은 증오의 감정으로 그녀를 상대하지만, 자신이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사실은 내 가슴에 각인되었다. 내가 어머니에 대해 가지는 마음 또한 그러했다. 나는 학교를 쉬며 소나무 숲에 누워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져 죽기도 했고, 내 영혼은 아주 거칠게 문을 쓰러뜨리며 우리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나 역시 어머니의 코 하나조차 꺾어놓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파란 하늘 저 깊은 곳, 바다 저 멀리로,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불렀다. 고향인 어머니를 불렀다.”
구태여 정신분석학의 성과를 옮기지 않아도, 우리는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애정이 인간의 필수적인 조건임을 깨닫고 있다. 모성은 인간의 기초를 형성 하는 양분으로, 이의 결핍은 예상치 못한 삶의 국면에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하지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이란 없다.
보잘것없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 어떤 변명에도 이것이 드러난 빈자리는 쓰라리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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