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생명연습 - 김승옥

sinook 2017. 4. 14. 11:17


「생명연습」  김승옥


그러한 왕국에서는 누구나 정당하게 살고 

누구나 정당하게 죽어간다

피하려고 애쓸 패륜도 없고

그것의 온상을 만들어주는 고독도 없는 것이며

전쟁은 더구나 있을 필요가 없다

누나와 나는 얼마나 안타깝게 

어느 화사한 왕국의 신기루를 찾아 헤매었던 것일까



“흥청대는 항구의 여름밤과는 상관없이 바위처럼 고독한 자세 하나가 우리의 눈앞에서 그의 기나긴 방황을 시작하고 있다.”


여수, 항구 도시의 비탈진 언덕, 소년과 그 소년의 누나는 바닥에 엎드려 건너편 의 선교사의 수음 장면을 몰래 지켜본다. 보편에게 느껴지는 이 색정의 이미지는 김승옥에게는 생명에의 애착으로 환기된다. 어린 호기심이 갈구하는 세상에 대한 궁금증은 쓸쓸히 자리잡은 생의 터에 화사한 빛 한 줄기를 쏟아낸다.

수백의 책을 거쳐 다시 김승옥을 집었다. 얼마간 쌓은 독서에 생겨난 자긍도 없지 않았기에 가뿐히 기억의 상기를 기대했을 뿐이다. 그러나 거리는 더 멀어져 있다. 스무살의 그와는 서른을 넘겨도 도무지 쉬이 만나기 어렵다. 

누구나 자기의 세계를 갖는 것은 아니며, 그마저도 세계가 가진 정합적인 완성이 조악한 모습을 띠는 경우가 많다. 한편 사건은 사건에 그치지 않으며 언제나 의미 속에서만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가 갖는 다층적인 풍요에 삶이 지체될수록 인간은 고통에 빠진다. 얼마나 그의 삶은 고통이어야 했을까. 언어의 천재가 언어를 잃었다.


이 단편은 압축을 완강히 거부한다. 서사를 대신해 인상적인 몽타주들이 짜임새 있게 교차한다. 제 세계를 지닌 인물들, 


자를 대고 그은 직선에 윤리의 위기를 느끼는 만화가 오씨와

여자들을 하나하나 정복해가며 련민을 외치는 친구 영수와

유학길에서 만난 애인을 배반하고 입신을 위해 유럽에 건너간 한교수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것은 여신의 멘스라는 한교수의 딸과

어느 때는 하늘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지옥 같기도 한 다락 세계의 형과

가족의 화해를 위해 아름다운 노력을 벌이던 누나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관찰자이자 그 모든 세계의 종합을 가슴에 담는 주인공


이 노회한 주인공은 우습지 않을 수 없다. 극기의 일환으로 머리부터 눈썹까지 면도로 밀어버린 동기와 제 슬픔조차 고민에 빠져 생각해내야 하는 한교수와 영성의 이름으로 제 생식기를 잘라낸 전도사 그리고 희롱할 여인에게 최음제를 사용하고 자기모멸에 빠진 영수, 이들의 기만적인 세계가 참으로 보잘것이 없다. 

차라리 제 몸을 으르릉대는 밤 파도에 던졌던 형의 결행이 있어 세상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가. 야음을 틈타 호젓한 나무 그늘 아래서 수음하는 선교사의 모습은 얼마나 인간적인 것인가. 


“한 오라기의 죄도 거기에는 섞여 있지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거기에서 우리는 평안했고 가기에서 우리는 생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은 다면체였던 것이다.’라며 인생이 가진 온갖 국면과 그 마디마디의 끝마다 남는 아릿한 쓸쓸함을 주인공은 아니, 김승옥은 너무 서둘러 알아버렸다. 저마다 사람들의 세계가 가지는 곰팡이와 거미줄들에 애정과 생명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대는 요청한다. 사실의 형해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려 들지 않는 

세상의 가난에 대해 누군가는 시를 써주기를 

누군가는 노래를 불러주기를 

그래서 다시 김승옥

다시 김승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