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 사카구치 안고
사카구치 안고 – 단편집 ‘백치, 타락론 외’ (최정아 번역, 책세상)
「백치」
그들의 모자와 장발, 혹은 넥타이와 셔츠는 예술가였으나 그들의 영혼과 근성은 회사원보다 더 회사원적이었다
도쿄 변두리의 어느 마을 주인댁의 별채에 세들어 사는 이자와는 문화영화연출을 직업으로 하는 당대의 지식인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패전 위기의 일본의 현주소를 외면하는 지식인들의 허위 의식을 비난하면서도 스스로는 본디 가졌던 예술에 대한 열망 없이 비소해져가는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신문기자니 문화영화 연출기자니 하는 것은 모두 천업 중의 천업이었다. 그들이 아는 바는 시대의 유행이라는 것뿐이고~ 자아추구라든가 개성이나 독창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일상 대화에는 회사원이나 관리나 교사에 비해 자아네 인간이네 개성이네 독창이네 하는 말이 지나치게 범람했으나 어디까지나 말뿐이었으며, 실제로는 있는 돈 죄다 털어 여자를 꼬셔내어 밤새 술을 퍼마신 이튿날의 속 쓰림이야말로 인간의 고뇌라고 여기는 한심한 작자들이었다. ~신문기자란 그저 그 정도의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 시대 자체가 그저 그 정도일 뿐이다.”
“월급봉투를 받아들면 한 달 늘어난 목숨 때문에 어처구니 없을 만큼 행복감에 젖었지만, 스스로 그 비소함을 돌이켜 생각할 때면 언제나 울고 싶어 졌다. 그는 예술을 꿈꾸었다. 예술 앞에서는 티끌보다 작게 생각되는 이백 엔의 급여가 어째서 뼛속에 사무치며 생존의 근저를 뒤흔들 만큼의 커다란 고뇌가 되는 것일까. 생활의 외양만이 아니라 그의 정신도 이백 엔에 한정되어 그 비소함을 응시하면서도 미치지도 않고 태연하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한심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한편 마을에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어느 미치광이가 젊은 백치 아내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이 백치는 자주 집 밖으로 도망나와 주인집의 돼지우리 그늘에 숨어들거나 그러다 마주치는 이자와에게 어리숙한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밤 그녀가 이자와의 방 옷장 안에 숨어들어 그를 놀래키는 일이 벌어진다. 이자와는 미치광이가 눈치 채지 않게 원만히 수습할 방도를 모색하지만 백치가 자기를 좋아해서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백치는 그 역시 자기를 좋아할 거라는 마음에 그와의 동침을 기대하며 찾아왔던 것이다. 그녀를 재워 보내려는 생각에 그녀가 잠들길 기다리는 동안 이자와는 백치라는 존재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애정을 느낀다.
“어줍은 정상인다운 분별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백치와 같은, 있는 그대로의 정직한 마음을 갖는 것이 인간의 치욕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나에게도 이 백치와 같은 마음, 어리고 아무 꾸밈 없는 정직한 마음이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머리맡에서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뇌까린다.
“당신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인간의 애정 표현은 결코 육체로만 하는 게 아니거든. 인간의 최후는 고향인데 당신은 이를테면 언제나 그 고향에 머무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상인이 자랑하듯 늘어놓는 말의 무기력을 통감하는 그는 이 백치가 가진 말의 어눌함과 무구에 대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도대체 말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인간의 애정에 대해서 진실에 해당하는 그 어떤 증거도 말은 알려주지 못하는데~”
동이 트도록 머리맡에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이자와는 비탄의 감회에 빠져든다.
“이 여자는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슬픈 인형 같지 않은가!”
한편 미국의 공습은 점차 도쿄의 외곽까지 옥죄여 들어왔고 이에 따라 폭격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백치는 여전히 이자와의 집에 유숙한다. 그리고 그들의 동거 생활이 이어지던 때 이자와는 그녀에게서 두 가지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그녀와 첫 육체적 관계를 가졌을 때 받은 인상으로 그녀의 육체가 정신의 공백 상태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드러내는 자신은 고뇌라고는 없는 온전한 육욕의 존재였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또 공습의 소란 속에 그녀가 내비쳤던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과 공포 역시 인간 존재의 비소함을 느끼게 하는 절망의 모습이었다.
이자와는 오직 육체만으로 이루어진 듯한 백치의 동물적인 모습에서 전쟁의 패배와 그에 따라 소멸하는 일본의 운명에 체념한다. 그리고 대공습 이후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벌판을 거닐며 비루한 인간의 결말을 담담한 심정으로 바라본다.
“인간이 새 구이처럼 여기저기에 죽어 있었다. 무더기로 죽어 있었다. 정말이지 새 구이와 다를 바 없었다. 무섭지도 않거니와 더럽지도 않았다. 개와 함께 나란히 불타 죽은 시체도 있었다. 그야말로 개죽음이라 하겠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개죽음으로서의 비통함도, 여하한 감개도 없었다.”
드디어 이자와가 사는 고장에서 폭격이 하루 앞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소개령에 의해 서둘러 대피하지만 이자와는 같이 대피 행렬에 오르면 백치의 존재가 발각될 것이 분명하기에 궁색한 변명으로 도쿄에 남는다.
“난 말이오, 아무튼, 조금 더 남아 있겠습니다. 일이 있거든요. 난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절체절명의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해볼 기회를 잡은 이상 그 극한점에서 최후의 거래를 해볼 책무가 있어요.”
결국 대부분의 사람이 빠져나가 텅 비어버린 마을에는 미국의 폭격이 벌어졌다. 불바다가 되어버린 주위에서 그와 백치는 엄습해오는 불안에 대피할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다행스럽게도 공습이 잦아들 때까지 그들은 어느 숲속에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아비규환의 혼란 속에서도 백치는 그에게 졸립다며 피곤을 호소한다.
“이 여자는 역시 단지 하나의 육괴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여자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사람들 모두가 불탄 잔해의 연기 속을 걷고 있다. ~지금 잠을 잘 수 있는 이는 죽은 사람과 이 여자뿐이다. ~여자는 희미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코고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돼지 울음소리를 닮았다. 그야말로 이 여자 자체가 돼지 자체라고 이자와는 생각했다.”
모든 게 파괴된 생활의 터전에서 백치를 옆에 두고 이자와는 삶에 대한 아무런 열의도 갖지 못한다. 그녀를 두고서 떠나는 일마저 새로운 생에 대한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의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역시 백치와 함께 육욕의 존재가 되어 생존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꿈꾸었던 예술적 포부 대신 그토록 천격스럽게 생각하던 생의 비소함에 동화될 수밖에 그에겐 어떤 도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