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어디로' - 사카구치 안고
사카구치 안고 – 단편집 ‘백치, 타락론 외’ (최정아 옮김, 책세상)
최고의 것을 갖든가, 아니면 그 무엇도 갖지 않든가
「어디로」
“본능이라는 것을 방 안에 들이지 않기로 했던 것인데 어느새 음식보다도 먼저 여자의 몸이 아무 주저 없이 나의 고독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왔고, 때문에 솥이나 냄비가 자연스레 같이 따라 들어와 자리잡아도 이미 내 주관만을 고집할 수 없을 만큼 순결에 대한 지조가 흔들리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삶에서 무언가 하나의 순결과 그에 대한 정절의 의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나처럼 나태한 낙오자의 비애가 그림자에까지 스며들어 따라다닐 지경에 이르면 무언가 하나의 순결과 정절을 지키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는 법이다.
나는 초라한 것이 싫고 그저 먹고 살아갈 뿐이라는 의식이 그 무엇보다 견딜 수 없어, 궁핍할수록 오히려 낭비하며 한 달치 생활비를 하루에 탕진하고 탕진하지 못하면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리는데, 그것이 나의 이십구 일간의 궁핍에 대한 단 하루의 복수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낙오자를 좋아했다~ 더 어릴 적부터 포와 보들레르나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을 그들의 문학과 함께 낙오자들로서 사랑했으며, 몰리에르나 볼테르와 보마르셰에 탐닉한 것도 인생의 저변에 부동의 암반을 드러내 보이는 허무에 대한 열애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낙오자에 대한 나의 편향은 더욱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니가타 중학교에서 삼학년 여름에 쫓겨났는데, 그때 학교 책상 안쪽에, ‘나는 위대한 낙오자가 되어 어느 날엔가 역사 속에서 소생하리라’고 거창한 문구를 새겨놓고 왔다. 분명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대장이나 장관, 혹은, 비행기 조종사 같은 것이 될 생각이었건만 언제부터 낙오자로 지망을 바꾸었는지 모르겠다.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미움을 한 몸에 샀던 나는 언제부턴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세상을 백안시하게 되었던 것이리라.”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가난이란 그저 궁상맞을 뿐, 전혀 심각하지도 엄숙하지도 않으며 어디까지나 한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난이라는 것이 그저 구차하고 한심하기만 한 것임을 알지 못할 만큼 현실 인식력이 없다면 문학 같은 건 하지 않는 쪽이 좋다.
내게는 벌어먹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가난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포기하고서 그런 자신의 한심함을 바라보았다. 놀기 위해서라면 일하겠다. 사치와 낭비를 위해서라도 일하겠다. 하지만 일을 한다 한들 도저히 내 성에 찰 만큼의 호사와 사치를 누릴 것 같지 않아 결국 나는 일하지 않는다. 내 생활의 원리는 이렇듯 단순 명쾌했다~ 나의 성숙한 사상과 문학의 과실에 대한 수확을 기다리기에 가난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대신에 내가 살기 위하여 언제나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일과 능력에 대한 자신감(pride)이었다. 하지만 자신감이라는 것은 무너짐을 본연의 속성으로 하고 있어, 자신감이라는 형태로 가슴에 머물러주는 것은 평생에 며칠도 되지 않는다. 이놈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놈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아부하고 치켜세워도 자기 자신은 속이지 못한다.”
“나는 가난의 정신성(가난이 가지는 서정적인 우월성 정도의 의미) 따위는 인정하지 않는, 육체에 기초하는 사상을 가졌으므로, 분위기 상의 낙오자(가난을 근거로 자신의 고결함을 자랑하는 이)가 되지 않았고, 때문에 서정적인 낙오자 기분이나 염세관은 없었다. 말하자면 나는 낙오자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 항상 자신감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붕괴 직전의 상태에서 어떻게든 실질적으로 자신감을 지켜내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이외에는 자신감을 속일 만한 방법이 달리 없었다.”
“나는 갖지 않도록 노력했다. 어중간한 소유욕은 서글프고 초라한 법이다. 나는 전부를 소유하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이 기차 여행은 여자가 나를 이끌지만 내 영혼의 행선지에는 누가 나를 이끄는가. 내 영혼을 나 자신이 쥐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이것이 진정한 낙오자다~ 자신의 영혼을 거머잡지 못한다는 것, 이만큼이나 절실한 공허함과 비참함, 한심함이 있을 리 없다~ 최고의 것을 갖든가 아니면 그 무엇도 갖지 않든가, 왜 그 정절을 잃고 말았던가.”
“나는 ‘형식의 타락’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그저 볼썽사나운 것일 뿐, 본래가 시시하며 영혼 그 자체의 윤락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자는 너무 진부했고, 나는 그 영혼의 저열함이 싫었다~ 나의 호색을 자극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 진부한 영혼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허세에 반발을 느꼈다. 가식적인 외양에 비해 실제적인 내용의 저급함을 경멸했던 것이다.”
“가장 더러운 데까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주리라.”
“나는 타인을 모욕하고 타인에게 상처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애틋함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열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해득실을 따져 매사에 균형을 맞추려는 마음가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당당하게 내던짐으로써 그 속에서 구원의 길을 구하는 방법 외에 올바른 마음가짐이란 없지 않은가. 그것은 내가 가진 단 하나의 확신이었다.”
“나는 자신의 허망함에 쓸쓸해진다. 허망한 말만을 좇고 있는 허망한 스스로에 실증을 느낀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토록 허망하고 비추한 하나의 그림자는, 나는 기차를 보기가 싫었다. 특히 덜컹덜컹 소리내며 달리는 화물열차가 싫었다. 선로를 보는 일은 애달팠다. 목적도 끝도 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행로를 보는 듯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며 지냈다. 여자들의 왕성한 육욕의 그늘에서, 저속한 영혼의 그늘에서, 에고이즘의 그늘에서, 내가 도대체 나 자신이 그 이상의 무엇일 수 있을까. 어디로? 어디로?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어느 한 문단 조차 가벼이 뛰어 넘을 수가 없다. 이러한 공명의 체험은 반갑고 동시에 비애를 갖는다.
이렇게 살아도 되겠는가
그가 대답한다
너의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래야지
위대한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일을 무척이나 쉽다. 그러나 그 확신을 언제까지나 가슴 속에서 버리지 않고 사는 데는 무척이나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감은 찰나에 자신의 숭고한 위세를 뽐내고, 이내 허공에 그 윤곽에 대한 흔적만을 남긴다.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이런 방식의 삶은 얼마든지 타당하다. 저속한 공격은 언제든 가장 위협적이지만, 이제 상처 같은 건 아예 돌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말이다.
‘그럼 계속 해보겠습니다.’
‘그럼 계속 살아보겠습니다.’
가장 더러운 데까지, 가장 아름다운 데까지